수졸당(守拙堂)은 진성이씨 하계파의 종택이다.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선생이 분가 하실 때(17세기) 지어진 이 집은 '하계종택' 또는 '동암종택' 이라 하나 동암의 장자 수졸당(守拙堂) 이기(李技 1591~1654)선생의 호를 당호로 사용하여 수졸당으로 명명되었다.
동암은 영특함과 포용력이 남달라 '대현의 후예답다'는 칭찬을 들었으며, 퇴계로부터는 '나를 계적(繼蹟)할 자는 이 아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형이 일찍 죽어 퇴계 후사 문제가 블거졌을 때 동암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다'는 이른바 '형망제급(兄亡弟及)'의 관행을 거부하고 큰 집을 지키고자 했다. 동암은 홀로된 형수를 돌보며 둘째 아들을 성장시켜 혼인과 동시에 큰 집으로 보내 퇴계종가를 보전하였다. 전란 중 여러 고을의 지방관으로 나가 전재민(戰災民)을 구호하고 군량미를 조달하여 명관으로 이름을 떨치며 명종때 원주목사를 지냈다. 사후에는 선무원종공신에 추록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불천위로 모셔지고 있다. 그의 아들인 수졸당 이기선생 또한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또한 문순공의 증손으로서 전대(前代)의 사업을 익히 듣고 남은 규범(規範)을 능히 지켰으며, 사우(師友)를 좇아서 의리(義理)를 강마(講磨)하였다. 수졸당 이기선생은 부화(浮華 실속없이 겉만 화려)함을 없애고 본실(本實)을 도타이(깊고맑게) 했으며 빛을 감추고 자신을 수양하면서 남이 알아 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수졸당 뒤편 산에는 퇴계선생과 선생의 큰며느리 봉화금씨의 묘소가 있고 앞편 산에는 퇴계선생의 손자인 동암의 묘소가 있다. 퇴계묘소는 유계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소박한 묘비만이 공의 높은 품격을 기리고 있고, 퇴계묘소로 가는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묘소는 살아서 모신 시아버지를 죽어서도 모시는 효심 깊은 공의 며느리의 묘소가 있다. 동암선생은 생전엔 조부가 계셨던 양진암 발치에 사후엔 조부의 묘소가 보이는 곳에서 우러르고 있다.
수졸당의 원래 위치는 퇴계선생께서 분가하여 처음 터를 잡으셨던 양진암터 아랫쪽에 있었으나 1975년 안동댐 완공으로 인하여 현재 위치로 이건되었으며 본채, 정자, 사당, 재사로 이루어져 있고 2003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본채는 지을 당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싸리나무를 베어 대들보로 하였는데 보통 가옥에서는 보기 드물게 크고 웅장하다. 재사(齋舍)는 동암의 사후(18세기)에 지어졌고 동암의 묘사를 위한 건물이며, 수졸당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ㅁ'자 형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집이다. 재사는 건립당시 평면구조의 옛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